아래의 글은 어떤 문화적인 징조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의견이고, 누군가를 씹겠다는 의미보다는 그 분의 역활성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기 위한 것임을 알아 주시기 바라며, 어중간하게 문학판에 새로운 이미지 도식을 새기려 하는 것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다방면으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쓰는 내 자신에 대한 글쓰기 반성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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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탈 시대의 아날로그 문학의 시각



 

1. 들어가는 글
2. 게시판 문화의 형성과 진보
3. 실사의 시선과 관념의 시선 사이의 순수
4. ISM인가 문화 현상으로의 자기 복제인가
5. 맺음말



3. 실사의 시선과 관념의 시선 사이의 순수 

먼저 용어 정리를 하고 시작 하겠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할 내용은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것이며, 이 언어를 인화하는 원인을 제공하여 주는 시선에 대해 말을 하고자 한다.
실사의 시선은 우리의 눈을 통해 받아 들인 풍경에 대해 느낀 심상을 그대로 언어로 인화해 내는 것을 말하며, 관념의 시선은 디자탈 카메라의 시선으로 인화화 낸 이미지를 다시 언어로 재 인화해내는 것을 말한다.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를 놓고 보면 문학의 언어 또한 관념의 언어가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풍경을 보고 인화를 해 내는 과정이 일차적인 작업인지 아니면 이차적인 작업인가에 그 기준을 둔 것이기에 일차적인 인화의 과정을 거치는 문학의 언어를 실사의 시선으로 놓고, 디카로 인화한 풍경을 다시 이차 인화를 하는 과정을 관념의 시선이라고 정의를 하겠다.

일반적으로 문학이라는 것을 구분 지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분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수 문학인가 아닌면 상업 문학인가하는 것이다.
이 나눔의 경계가 되는 것은 문학 자체의 순수성에 의미를 두고 하는 활동(창작)인지 아니면, 문학 본연의 본질
과는 상관없는 상업성을 기초로 한, 문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그 부산물을 돈으로 치환하기 위한 활동(창작)인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디카시는 문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디카시도 물론 문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순수성에 대해서는 재고를 해 봐야한다. 그 이유는 디카시가 가지고 있는 시선이 실사의 시선이 관념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기법상으로는 포스트 모던이나 아니면 다원주의식 이론을 끌어들여 문학적인 부분에 대한 논쟁은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결과물을 합리화하기 위한 자기 주장이지 문학 자체에 대한 순수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을 해 줄 수가 없다고 본다.
왜?,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희도에 의한 빛의 변질이 심한 LCD 모니터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LCD보다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CRT라고 부르는 평면 모니터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디지털 카메라에 장착된 LCD 화면의 외곡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로, LCD 화면에 포착이 된 풍경은 실사의 우리가 눈으로 보는 풍경과 틀릴 수 있다는, 우리가 사진이라 부르는  원본의 본질성 자체에 대한 순수성을 먼저 의심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각도에서 오는 빛을 받아 찍는가에 따라, LCD 창의 각도가 어떤가에 따라 인화되는 풍경은 틀릴 수 있으며,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결과물을 디지칼 카메라는 출력할 수 있다.
그것이 단지 내가 눈으로 본 이미지이거나 내가 그 당시에 느꼈던 형상을 그대로 찍었다는 느낌의 일맥상통성만 유지하는 것일 뿐이지, 그 당시 내게 어떤 심상의 서정성을 발동하게 만들은 이미지는 아닐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내가 눈으로 확인한 이미지, 내 맘속에 그려진 심상, 디지탈 카메라로 잡은 이미지, 내 맘 속에 그려진 심상은 전부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심상은 다시 언어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바뀔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처음 가졌던 심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디지칼 카메라의 시선은 일단 왜곡이라는 시선으로 시작을 한다.

보통의 디지탈 카메라로 이미지를 찍어 그것을 컴퓨터나 다른 편집 도구로 읽혀 왔을 때 그 이미지가 내가 본 이미지와 틀리거나 불필요한 색감들이 많이 들어가 있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편집 도구를 이용하여 보정작업이라는 것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작업에서 우리가 본 이미지는 이미 왜곡이라는 일차적인 가공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 작업으로 인해 내 심상에 담겨져 있던 원본의 이미지는 이미 손상을 입는다.
손상을 입은 이미지를 대상으로 인화지를 넣고 글로 이미지를 인화한다하는 것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다.
시각이 감지하고 있는 이미지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 디지탈 카메라 렌즈로 감지한 이미지, 저장한 이미지는 처음부터 서로 동일한 선상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간직된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 이미지로 그 속에는 인간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지만, 디지탈 카메라 속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디지칼 이미지로 그 속에는 감수성이라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를 인화 했을 때 그 속에는 고의적이적이던 아니던간에 변조의 동작이 삽입이 되어 순수성은 자연스레 치명타를 잃는다.

그리고 이미지를 찍어낼때 카메라를 가지고 작동이라는 것 즉, 옵션 기능을 주어 밝기라든지 조명이라든지를 조절해 보았을 것이다. 고급 카메라의 경우라면 빛조리개의 기능을 사용도 해 보았을 것이고, 그리고 망원렌즈를 사용하거나 접사 촬영이라는 것을 해 본적도 있었을 것이다.
안되었지만, 이러한 기능은 우리의 눈으로는 찍어 낼 수 없는 기계만이 가진 시각으로 찍어 내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 이미지로 인화를 할 것인가? 언어로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순수성은 없다는 말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사진이 주는 이미지를 가끔 우리가 본 이미지로 착각을 하는 누를 범하고 있고, 사진이 주는 매력에 빠져 우리는 우리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동일시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 결과물이 디카시의 형상이고, 디카시의 탄생을 가능케하는 디카 이미지의 순수성을 맹목적으로 믿으려 하는 것이다.

이미 순수하지 않는 이미지에서 또다른 결과물을 현상한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글은 계속 수정이 됩니다.)